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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를 넘어 30일 나홀로 여행기 17] : 3등석 2층의 우울함
    해외 여행/러시아&인접국가 2019. 6. 7.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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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81 기차 탑승 (이르쿠츠크 -> 카잔행) 첫 날

    여행 열이틀 째 / 19년 3월 25일

     

    모든 짐을 들고 이르쿠츠크 시내 관광을 했더니 몹시 피곤했다.
    자정에 기차를 타서 1시가 넘기 전에 잠이 들었는데, 
    새벽 3시쯤에 누가 날 깨웠다. 
    누가 날 깨우는 거야???

    일어났더니 내 표를 검사했던 남자 차장님이었다.
    어리둥절하게 일어나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더니 
    내 표를 보여주며 예약을 잘못했다고 했다.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뭔가가 잘못됐을 때 본능에 따라 느껴지는 경고였다.

     


    표를 보니 3월 25일 자정이라고 쓰여 있어야 할 표가
    4월 25일 자정이었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내 여행은 3월과 4월에 걸쳐져 있어서 기차표 일부는 3월이었고 일부는 4월이었다.
    그래서 그 중 3월이어야 할 표 하나를 4월로 바꿔 예매한 것이었다.

    눈 앞이 깜깜했다. 
    어떻게 하지?? 나 지금 쫓겨 나는 건가???
    내려서 차표를 구매하고 다시 타면 되는 건가?
    시간 내에 못 사면 기차 못 타는 거고, 내 일정은 다 틀어지는 건가?
    오만 생각이 다 들면서 제대로 된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차장님한테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어보니
    차장님들의 대장님(유치한 호칭이지만 멋있으니까 이렇게 부르자!)인 듯한 여자분을 모셔왔다.
    그러더니 내 표를 유심히 보면서 해결책을 제시했다.
    다급하게 번역기를 켰다.

     


    3시 반이 넘는 시간이었는데,
    지금 빨리 지마(Zima)라는 곳에서 내가 가려는 카잔까지의 표를 예매하라는 것이었다.
    지마에서 출발은 5시 15분이었다. 
    그 표를 구할 수 있다면 이 기차를 탈 수 있고 아니면 내려야 한다는 것 같았다.

    인터넷이 되지 않았다.
    울고 싶었다.
    인터넷이 되어야 기차표가 있는지 없는지 알아볼 텐데 넓은 러시아 땅은 허락해주지 않았다.
    정차역 근처에 오자 인터넷이 되기 시작했다. 
    다른 객차에 2층 자리가 하나 남아 있었다. 
    1층 자리는 없었다. 
    차장 대장님은 잘됐다며 예매해 보라고 사라지셨다. 


    이제부터 결제와의 외로운 사투가 시작 됐다.
    결제에서 자꾸 실패가 났다.
    인터넷이 온전한 상태가 아니라서 결제중에 연결이 끊기는 것 같았다.
    정말 20~30분 결제 시도를 했으나 되지 않았다.
    중간에 차장 대장님도 다시 오셔서 예매 끝났느냐고 물어보셔서 더욱더 슬펐다.
    지마 도착한 4시 45분이었는데 4시가 다 돼가는 시간이었다. 

    내 객차 담당의 차장님은 다 이해한다는 듯 인자하게 웃어주셨다.
    30분이 지나서 결제에 성공했다.
    정말 2층은 너무 싫었지만 2층 자리도 몇 개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냥 2등석을 해버릴까 했는데 체험해보는 게 어디냐고 자위하며 3등석으로 예약을 했다.
    (이 결정을 계속 후회 함ㅠㅠ)
    예약 성공 후 바로 4월 표는 환불 처리 했다. 

    결제가 끝나고 차장 대장님한테 확인도 받자 이제 남은 일은 짐을 옮기는 것이었다.
    열차에서 쓸 물건들을 다 빼놨고, 짐볼과 DSLR 같은 것도 다 빼놨으며 음식도 다 빼놓은 상태였다.
    물론 리넨세트도 있었다. 짐이 정말 한 짐이었다.
    그 짐들을 확인하며 잠시 정신을 놓고 있는데 차장님이 도와주시겠다고 하셨다.
    정말 고마웠다.ㅠㅠ
    효도르와 덩치와 외모가 닮으셨는데 너무나도 친절하셔서 곰돌이 같이 느껴졌다.

    배낭을 등에이고 짐들을 바리바리 들고 열차를 거슬러 올라갔다. 
    다행히 3번 객차에서 5번 객차로 이동이라 아주 멀진 않았다.
    3번 객차 차장님은 5번 객차 차장님한테 사정을 설명하고 사라지셨다.

    짐을 내려놓자니 눈 앞이 다 깜깜했다.
    3번 객차는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여긴 거의 다 찼다. 
    소음을 내기 민망한 상황이었는데, 새벽 시간이라 어두웠고 처음 올라가는 2층 침대는 너무 높았다.

    2층 짐칸에 짐을 올리는 것도 불가능해 보였다. 
    일단 2층 침대에 모든 걸 다 올렸다. 

    그리고 2층을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
    사람이 자고 있지 않으면 침대를 밟고 올라가겠는데
    자고 있으니 밟고 올라가기 그랬다.
    복도 쪽으로 발 하나 올려놓게끔 나 있는 조그마한 계단으로 올라갔다.

    2층 침대 쇠사슬이 대각선으로 가로 지르고 있어서 여차하면 떨어질 뻔했다.
    2층은 생각보다 더 낮았다. 
    목을 옆이놔 뒤로 완전히 숙여야만 그나마 앉아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짐을 위에 짐간으로 올렸다.
    짐이 많기도 했고 비닐 같은 것도 있어서 조용히 한다고 했는데 소음이 났다. 
    결국 1층 사람한테서 짜증 섞인 러시아어가 튀어나왔다.
    러시아어를 몰라서 다행이었다. 좋은 말이 아닌 것 같았으니..ㅠㅠ

    최대 난간은 시트 깔기였는데,
    원래는 쫙 펴서 움직이지 않게 옆쪽을 침대 안쪽으로 집어 넣지만 
    쫙 펴는 것도 힘들고 소리도 났다. 

    그냥 적당히 펴서 누웠다.
    갑자기 모든 게 다 서러워졌다.
    내가 잘못 예매한 거라 내 잘못이지만,
    새벽에 갑자기 일어나서 잠도 못 자고 같은 가격에 1층에서 2층으로 올라오고, 
    짐을 옮겨서 사람들한테 욕을 먹고....
    내 자신의 실수에 자괴감이 들면서 그냥 세상에 짜증이 났다. 
    엉엉...내가 이 시간에 짐을 옮기고 싶어서 옮기겠냐구ㅠㅠ

    그냥 혼자 서럽고 2층이 짜증 나서 뒤척이다 보니 어느새 '그 지마'였다.
    엄청나게나게 많은 사람이 탔다. 
    ㅠㅠ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기다렸다가 지마에서 정리할 걸 그랬나 싶기도 하지만...
    그러면 그때까지 서 있어야 했다. 
    서럽게 잠이 들었다.

     


    5시에 자서 11시쯤에 일어났다. 
    누워서 '아 2층 너무 싫다. 관이네 관' 이런 생각을 하며 주위 구경을 하면서
    2층을 어떻게 오르내리나 구경했다.

    다들 1층 침대를 밟고 내려왔다.
    고민하다 1층 침대를 밟고 내려왔는데 1층 사람이 러시아어로 뭐라고 화를 냈다.
    의기소침&짜증인 난 왜 나한테만 그러지?라는 생각으로 속으로 울면서 그냥 
    오케이오케이만 하고 홍콩커플의 객차로 향했다.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이랑 노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은 영어가 가능했다.

    헐...그들은 자고 있었다.
    12시 좀 넘었을 때 찾아갔는데 둘 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고 있어서 그들이 맞나 싶었지만
    옆에 놓인 가방을 보니 그들이 맞았다.



    일단 내 객차로 돌아왔는데 1층 사람은 자고 있는지 누워 있었다.
    점심 어떻게 먹지...?
    복도쪽 비어있는 자리가 있어서 휴대폰을 만지며 생각을 정리했다.
    사실 생각해보면 1층 사람이 자다 짜증이 났을 수도 있을만한 상황이었다.
    2층을 내가 원해서 선택한 건 아니고 일부러 소음을 낸 건 아니더라도 자다가 부스럭 거리면 얼마나 짜증이 나겠는가.
    먼저 사과를 해보기로 했다.

    번역기로 짧게 '내가 너의 잠을 방해했다면 정말 미안해'라는 문장을 번역했다.
    제대로 됐을지 안 됐을지 확인이 안 돼서 호흡 한 번 하고
    1층 사람에게 가 번역기를 보여줬다. 
    1층 사람은 20대 후반의 러시아 여자였다.
    그런데 번역기가 영 아니었던지 이게 뭐야?라는 표정으로 인상을 팍 쓰는 게 아닌가.
    살짝 졸아서 엇...설마 지금 번역기가 욕한 거 아니겠지?
    했는데 그 때 들려오는 'can you speak English?' 

    여자분은 영어를 엄청 잘했다.
    눈이 번쩍 뜨였다. 
    제일 큰 산이라고 생각했던 곳이 사막의 오아시스였다.

    반색하며 신 나게 어제 일부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내가 표를 잘못 예매하는 바람에 새벽에 이 자리로 오게 됐어. 그 때 널 깨운 것 같아서 미안하다고 하려구!
    했더니 'oh nooooo'라는 표정으로 
    아냐아냐, 난 원래 기차 안에서 잠을 잘 못 자서 예민해. 기차는 항상 시끄럽잖아?
    다만 네가 내 시트를 밟아서 그걸 조심해 달라고 말하고 싶었어
    라고 이야기 하는 게 아닌가.
    우리는 자기소개를 하며 수다를 떨었다. 
    타냐라는 이 러시아 여자분은 이르쿠츠크에서 나고 자라 지금은 벨라루스에 사는 무려 '번역가'였다. 

    헛 벨라루스? 비행기 타기 전 마지막 여행지인데!
    신이 나서 서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내 빈약한 사상력은 얼마나 부정적이었나...
    난 1층 사람과 대화하기도 전에 짜증 나고 지친 마음으로 날 싫어하는 짜증 쟁이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한 발자국 다가갔을 때 보는 실제는 또 다른 법이었다.
    점심때 까지 기차에서 내리고 싶었던 마음은 어느새 또다시 횡단 열차에 대한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던 중 정차역에 멈춰 섰다. 

     

     


    일란스카야라는 역이었다. 타냐에게 나갔다 오겠다고 하고 나갔다. 
    비가 오려는지 하늘이 어둡기 짝이었지만 내 마음은 맑음이었다.
    큰 역인 데 비해 사람이 별로 없었다.
    블라디보스톡과 비슷한 기차 사진 스팟도 있었다. 
    의미가 있는 역인 것 같았다. 

    간만에 깨끗한 바깥 공기를 마음껏 마시고 기차로 들어왔다.
    타냐는 1층에 앉고 싶을 땐 언제나 말하라고 했다. (타냐는 보통 계속 누워 있었다.)
    마침 점심을 고민하고 있어서 고맙다고 하고 얼른 먹었다.
    그리고 복도에서 책을 읽다가 낮잠을 잤다.
    달리는 내내 눈이나 비가 와서 뭔가 가슴이 울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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